대동법과 광해군의 개혁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대동법과 광해군의 개혁
개인적인 생각
변명을 하자면 저 공납제는 고려시대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개국멤버들이 나서서 바꾸려 했지만 바꾸지 못했고 쭉 내려왔는데,
임진왜란과 그 뒤에 이어진 전쟁으로 재산을 탈탈 털린 기득권층이 자신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백성들을 쥐어짜기 시작하면서 그 폐해가 더 커진겁니다.
무려 천년가까이 지속되던 제도가 바뀌는건데 쉽게 바뀌는걸 기대하긴 어렵죠.
누진세개념까지는 아니어도
생산기반(현재로 따지면 공장같은 개념)이 모두 토지로 귀결되던 시절에
세금의 기반을 토지로 이동시키는 개혁이라는 점에서
부자증세라는 부분은 맞는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00년이나 걸린건 문제지만,
그 100년동안 무효화되지않고 진행된것도 평가할 필요는 있다고 보네요
광해군은 정신이 나가서 궁궐공사 짓는데 세수확보 안된다고 대동법 퇴짜놓으면서
궁궐놀이 하다 반정을 유발했고,
인조는 뒤늦게 뒷수습한다고 해봤지만(광해군의 외교정책은 거의 계승)
공신들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해 유발된 이괄의 난으로 인해 조선의 북방군이 와해되서
결국 호란에서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못해보고 임란 시즌2 찍었고
그러고도 정신 못차리고 쌀본위의 세제개편은 고사하고 예송논쟁이니 나발이니 하면서
국정과 아무 관계가 없는 논쟁이나 벌이다 18세기에 들어서 겨우 대동법 하나 전국적으로 시행하는데.
명은 임란을 비롯한 만력삼대정으로 인한 재정의 고갈과 연속되는 무능한 지도자 덕에
얼마뒤 망하고 청이 들어서면서 완벽하게 은본위제의 조세제도와 상업체계를 도입해
강희옹정건륭 연간에 걸쳐 백여년간 유래가 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일본 또한 히데요시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고
역시 쌀을 중심으로 하는 조세제도와 은을 중심으로 하는 상업체계를 도용해
엄청난 호황을 누리는 시점에서 조선 혼자 뒤쳐진 상황.
대동법완전시행 + 상평통보의 국가화폐지정 콤보가 이루어지는건 숙종시기입니다.
청이나 도쿠가와막부보단 조금 늦지만, 위 두가지 제도를 통해서
조세제도가 쌀이나 동전으로 내도록 장려되었고, 실제로도 많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구요.
그리고 이렇게 거둔 쌀&동전을 통해서 상품경제발전의 토대도 마련이 되죠.
그리고 대동법의 시행은 광해군이 맞습니다(경기지방한정)
광해군이 대동법을 찬성하는 왕이었지만, 시행하지 못하게 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완전시행은 17C말 숙종시기구요.
광해는 어쩔수없이 끌려가듯 경기선혜법을
경기도에 한해 시행해보는데 '동의'했을 뿐이고 위에도 있지만
궁궐 짓는데 도움안되는 이 법의 확대시행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반대합니다.
이원익, 곽재우 그 이외에도 수많은 신하들이
경기선혜법의 전국적 확대를 주장하고 상소하지만 광해의 반대에 부딪혀서 좌초됩니다.
그리고 당장 위의 본문만 봐도 18세기네요. 대동법 전국시행.
뭐 반대하면서 정신승리 하는건 좋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바뀌지 않으니 내 알 바 아니고 더이상 댓글 달 일 없을 듯.
뒤쳐진 조선이라는 표현에 동의는 하는데요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궁궐문제는 광해가 정신나가서 그런건 아니죠 선조도 그렇고
정통성이 미약했던 왕이니 체면과 명분에 미친 나라였던 조선에서
궁궐재건에 신경쓸수밖에 없었다고 보는데요.
지금 시선에서야 삽질 그 자체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에
기본 상식으로 봤을때 필요했던 일이라고 봅니다만...
대표적으로 명나라 역사서에 잘못 기록된걸 고치겠다고
삽질을 거하게 해댄 나라가 조선 아닙니까....
그거 고쳐주니까 삼대에 영광이라고 난리친 나라고....
그리고 궁궐재건에 관한 문제제기는 인조반정을 정당화를 위한 구실이라고 봐야 된다고 봅니다.
왜란으로 궁궐 자체가 거의 다 날라간 상태에서
궁궐 재건 사업이 허약한 조선 상황에서는 치명적인 부담이였던건 사실이지만...
원래 조선이란 나라 자체가 페쇄적인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서 경제체제 자체가 허약하기 짝이 없었고....
궁궐 재건을 안할수도 없는거고 초기 제외하면 조선 경제가 멀쩡했을때가 있나요?
솔직히 광해에 실정이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생각하네요.
거기다 광해는 실정을 벌여서 짤려나갔기보다는
근본적으로는 신권한테 파워싸움에 밀려서 찍혀나갔다고 봐야 된다고 봅니다.
조선 왕들중에 엘리트가 은근히 많았지만 거둔 성과는 형편없었던게
신권이 미친듯이 강한 나라였고 그 기득권 세력 타파하기에는 왕권이 택도 없었죠.
암살당한 왕도 많은 조선 아닙니까...
그리고 인조가 광해군 외교정책 계승하지는 않았죠
처신을 거지 같이 해서 그 대가로 호란이 벌어진건데.....
나라 말아먹은 왕중 하나로 인조 꼽아도 될텐데요.
북방군 증발 문제도 공신문제도 있지만
조선 특유에 지방에 따른 차별대우란 문제가 컸구요....
부자증세리는 말은 맞아요. 저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이었어요.
토지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땅 빌려서 농사짖는 거였죠.
그런데 집집마다 공물 (특산물)내라고 하면
토지를 100평 갖고 있는 양반도 한 집 소작하는 농민도 한 집으로 계산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토지 소유량에 따라서 계산했잖아요.
1결 갖고 있으면 12두, 10결 갖고 있으면 120두 이렇게요...
땅을 더 크게 가지고 있으면 더 많이 내는 시스템에었죠...
광해군이 대동법을 반대한다는건 내용이 많은데 왜 반대했는지는 내용이 없네요.
즉위년 5월에 이미 선혜청(대동법 시행관청)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시행했습니다.
이후 6년 7월에 전국에 확대하자고 했으나,
"우리 나라가 토지에 따라 공물을 바치게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경기에서 쌀로 거두는 것이 한갓 본청(本廳)의 하인들이
교활한 짓을 하는 소굴이 되어 구애되는 점이 많으니 먼
장래를 경영하는 방법이 아닐 것 같다.
팔도에는 절대로 경솔하게 동시에 시행할 수 없다.
이 공사(公事)는 시행하지 말라."
라며 막습니다.
'토지에 따라 공물을 바치게 한지..' 에서
대동법이 이미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경기에서 시행해보았으나, 그 부작용이 있기에 경솔히 확대할 수 없다고 나와있습니다.
이후로도 대동세를 가로채는 지방관리에 대한 상소를 여럿 찾을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을 반대한것이 아니라,
(경솔하게) 전국에 걸쳐 시행하는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입니다.
'시사 Comment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자결혼비용부담 남녀에 대한 총각쌤의 생각 (0) | 2016.03.11 |
---|---|
세계에서 가장 예쁜 여자 : 오드리 햅번 이 선정되는 이유 (0) | 2016.03.10 |
biff 부산국제영화제 서병수 부산시장의 탄압 (0) | 2016.02.21 |
북한 로켓 발사 사드배치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0) | 2016.02.17 |
유럽의 경제위기 마이너스 금리정책 투자방식 (0) | 2016.02.16 |
댓글
이 글 공유하기
다른 글
-
남자결혼비용부담 남녀에 대한 총각쌤의 생각
남자결혼비용부담 남녀에 대한 총각쌤의 생각
2016.03.11 -
세계에서 가장 예쁜 여자 : 오드리 햅번 이 선정되는 이유
세계에서 가장 예쁜 여자 : 오드리 햅번 이 선정되는 이유
2016.03.10 -
biff 부산국제영화제 서병수 부산시장의 탄압
biff 부산국제영화제 서병수 부산시장의 탄압
2016.02.21 -
북한 로켓 발사 사드배치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북한 로켓 발사 사드배치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2016.02.17